제2 클뤼니의 건축 구성은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다. 투르뉘의 생필리베르가 대표적 예인데,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부르고뉴 실험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 가면서 활짝 꽃피웠다. 카롤링거 시대 때 처음 지어진 건물이 1007~1008년의 헝가리 침입 때 파괴되자 일차 증축이 있었는데 여전히 목조 평천장에 머물자 수도사들이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무려 세 단계를 거치며 석조 볼트 천장으로 대체하는 긴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석조 천장이 등장하면서 프랑스 성직자들은 초기 기독교 건축의 교회와 다른 새로운 공간 분위기를 절감했다. 중세 교회의 씨앗이 뿌리내리는 순간이었다.
노르망디와 네이브 월의 3단 구성 
이 지역은 지금은 프랑스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노르만 영국에 속했다. 이 지역의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은 독자적 발전을 하지 못하고 부르고뉴와 독일 등의 영향을 받아 큰 방향이 잡혔으며 여기에 노르망디의 독자적인 전통인 천측창의 벽체 통로와 이스트 엔드의 제형 예배당 등을 더해서 전체 구성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복합 구성을 갖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독일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다. 지리적으로 유럽 전체에서 북부지역에 속했으며 정치적으로도 독일의 라인란트 하류와 교류가 잦은 반면 프랑스 남부와는 오히려 단절되어 있었다. 초기 로마네스크의 지역별 차이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 기준인 천장 방식에서 독일의 목조 평천장이 주로 쓰였다.
그럼에도 노르망디의 초기 로마네스크가 중요한 이유는 천장 이외에 네이브 월에서 중요한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르고뉴의 실험이 주로 천장에 집중되어서 네이브 월은 2단 구성에 머무른 것과 대비적 짝을 이루는 현상이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완성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진행된 이 두 가지 구조 방식이 하나로 합해져야 이루어지게 되고 이 단계가 성기 로마네스크인 셈인데, 노르망디의 초기 로마네스크에서는 그 중 한 가지의 완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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